때는 1996년 초등학교 3월 2일
초등학교 4학년
당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다
오래된 역사를 담은 학교여서 그런지
건물 외벽 종종에서는 낡은 내음이 물씬 풍기고
정원 속 나무 몇 구르와 따스함을 내다 주는
머나먼 태양의 빛이 우리를 쏘아보고 있어서 그런지
피부에 와닿는 따스함은 포근함을 연상케 하였다
봄은 그렇다
부들부들 춥다가도 따뜻한 물에 닿을 때
닭살 돋으며 편안해지는 것처럼
나에게 봄은 그런 존재다
교실로 들어오는 햇살도 만끽하고 바깥 주변 곳곳에
피어나는 개나리가 나의 눈을 즐겁게 할 무렵
같은 반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야, 너 학교 끝나고 뭐 할 거야? "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생각해 봐도 나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요즘 시대 아이들처럼
학원이 즐비한 시절은 아니었으므로.
" 나 할 건 없는데, 왜? "
나에게 질문을 던진 수지 곁에는
진실이와 함께 있었다
키 크고 날씬하면서 눈망울도 큼지막한 김수지 옆에는
키도 작도 남자와 비슷한 커트머리에 피부는 까무잡잡한,
인물은 그다지인 최진실이 수지 곁에 있었다
뭐, 사실 김수지도 인물은 없다
이쁜 개구리 닮았다
" 아 그래? 그럼 학교 끝나고 뒷산 알지? 우리 학교 뒷산. 거기 갈래? 귀신 나온다는 소문도 있고. "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늘 나 혼자다.
누나들은 중학생이라서 늦게 하교하고
부모님은 집 근처에 아귀찜식당을 운영하시느라
밤 아주 늦게 오신다
때마침 같이 놀자는 여자 친구들이 있어서
사뭇 반가웠지만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꼴에 남자라고.
띵 동 딩 띵 딩 ~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학교 전체 울려 퍼졌다
그 종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아이들과 책상 서랍에서 각자의 짐을 꺼내어
가방 속에 차곡차곡 넣어 갈 채비를 해대는
수많은 아이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귀신이 나온다는 뒷산을 여자아이들과 가볼 생각에
살짝 겁이 났지만, 이것을 겁이라고 표현하기보다
매일 집에만 있었을 그 시간에 오늘은 집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약간의 기쁜 마음도 섞여있었다.
들뜬 마음을 안고 가방을 멘 후 교실을 나서니 1층 내려가는 복도 끝에 수지와 진실이는 나를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오는 나를 발견한 수지는 나를 향해 1층으로 내려오라는 손짓을 획 획 해대었고 그렇게 둘은 먼저 내려갔다. 드넓은 운동장이 펼쳐지는 광경이 보였고
1층에 도착한 후 나는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따뜻한 봄 내음은 내 피부에 그대로 와닿았고
둘에게서는 나에게서 느껴지는 봄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둘이서 수다 떨며 싱글벙글하기만 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이라기에 너무 어설픈.
그냥 언덕이 어울릴법한 뒷산이 나타났고 우리 셋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랐다. 마른 가지나무들이 생각보다 많은 탓에 거리에 있을 때보다 햇빚의 양이 적어졌고
귀신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다
하지만 나 혼자도 아니고 옆에는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비록 여자들이지만.
올라가다 보니 평평한 지점이 나타났고
그 쯤 우리 눈에는 벤치가 보였다
벤치 쪽으로 수지가 먼저 다가가 풀썩 앉았다
그리고는 진실이도 그 옆으로 앉았다
" 귀신은 어디서 나온다는 거야?
근데 우리 귀신 보러 여기까지 온 거야?
아무리 봐도 없을 것 같은데 "라고 말을 끝내자마자
진실이는 나에게 작은 선물상자 같은 걸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생뚱맞은 작은 선물 상자가 등장할 줄은.
" 풉,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인데
그때 학교에 안 나왔잖아... 풉
그래서 오늘 진실이가 너한테 주고 싶었대
근데 학교에선..... 풉,
못 주겠고 밖에서 줘야겠다며 여기에 온 거야 "
진실이는 부끄러웠는지 아무 말 안 하고
대신 수지가 말해주었다
꼭 누가 얼레리 꼴레리
놀리기라도 하는 듯하면서.
그렇다. 2월 14일은 학교에 없었으니 3월 개학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나한테 이제라도 주려고.
값과 크기를 떠나 살면서 처음 이성에게 받아본 선물상자에 담긴 몇몇 개의 초콜릿을 통해 발렌타인데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뒤늦게 고맙다는 말을 꺼내면서 선물상자를 건네받았는데 나는 뭐가 살짝 민망했는지 빨리 내려가자고 다독였다
그렇게 우린 밑으로 내려왔고
아이들과 인사를 한 후 곧장 집 방향으로 틀어
나는 걸었다.
집에 도착하여 선물상자를 개봉하니 달콤해 보이는 수제 초콜릿들이 10개 정도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선 달콤함을 만끽했다
인생 처음으로 나를 좋아하는 듯했던 여자에게서
받아본 선물이자 초콜릿이었다.
내 생애 첫 발렌타인데이는 이랬다.
나에게 발렌타인데이를 알게 해 줬던
진실아, 지금 생각해 보니 너에게 참 고마워했어야 했다는 걸 이제 깨닫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기분도 묘하고 그때의 향수가 느껴진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우리 두 아이들을 데리고 평택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지금이다. 그리고 그 뒷산도 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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